李 舜臣 古詩碑 - 陳中吟 文學,詩...碑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
서 해 어 룡 동 맹 산 초 목 지
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임금의 피난소식을 접한 후 나라의 앞날에 대한 걱정과 장부의 충혼을 느낄 수 있는 글이다.

이 순신-李 舜臣 (1545∼1598)


1. 가계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그의 12대손이 된다.
그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변-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거- 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할아버지 백록-百祿이 조광조-趙光祖등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소장파사림-少壯派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후로는 아버지 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러하였음에도 그가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그는 위로 희신-羲臣, 요신-堯臣의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중에서 복희씨-伏羲氏, 요-堯, 순-舜, 우-禹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그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2. 출사와 관직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불행히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중앙에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 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3. 왜침에 대비
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여수를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4.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2년 4월 14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그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장졸을 이끌고 동래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그는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그는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5. 옥포대첩
4일 새벽 출항을 하니, 이때 선척은 전선 24척, 협선-狹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일 옥포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척이었다.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화시-火矢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6. 노량대첩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赤珍浦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다.
제1차 출동 후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 다음 출동에 대비하고 있던 그는 일본수군의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합동으로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척이 사천·곤양 등지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예정출동일을 변경하여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5월 29일 그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露梁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그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열박-列泊하고 있었다.
그는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 나대용-羅大用등이 부상하였고, 그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7. 당항포대첩
6월 2일 왜선이 당포-唐浦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龜井玆矩와 구루시마-來島通元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당포해전 다음날 그의 함대는 가박지-假泊地인 창신도-昌信島를 떠났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출격을 명하고 발선-發船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그는 매우 반갑게 맞았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와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내만-內灣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중이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와같이 그는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陞品되었다.

8. 한산대첩
그뒤 그는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見乃梁에는 적장 와키사카-脇坂安治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그는 약간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쳐 일제히 총통-銃筒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層閣船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家臣 와키사카사베에-脇坂左兵衛, 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를 위시하여
이름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그는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계-陞階하였다.
9. 부산포대첩
한산대첩 후 그는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安骨浦: 현재의 진해시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九鬼嘉隆, 가토加藤嘉明등의 일본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중이었다. 그는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焚滅하였다.
제3차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그는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 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며 부산포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沒雲臺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絶影島:지금 영도-影島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수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草梁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督戰旗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右部將 정운-鄭運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중인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척을 격파하였다.
날이 어둡자 그는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특히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이 전사하였다.
10. 정유재란과 실각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뒤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그는 다음에 다시 있을 대전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명·일간의 강화회담이 깨어지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그가 모함당하게 되었다.
또,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그에게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11. 백의종군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가혹한 고문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죽음 직전에서 그는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그는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잠시 들러 성복-成服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양-漆川洋에서 전멸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12. 재기용과 명량해전
원균의 패배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기용하게 되었다.
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은 고작 12척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鳴梁海戰)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전투를 벌여 적선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사기가 꺽인 조선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하였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장악한 그는 보화도-寶花島:목포의 고하도-高下島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군영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시켰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 수만가를 이루게 되었다.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 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정도로 성세를 이루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3. 노량해전과 순국
1598년 11월 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지 않은 줄로 알고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다.

14. 사후의 존숭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 亂中日記>·시조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陣中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忠烈祠, 순천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賜額, 현충사가 입사-立祠되었다. 그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최가 되어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오던 <난중일기>와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그의 일대와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十景圖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또, 그를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의 <이순신전 李舜臣傳>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렸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西厓集, 燃藜室記述, 亂中雜錄, 李忠武公全書, 宣廟中興誌, 亂中日記草, 懲毖錄, 明史, 脇坂家傳記,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G. A. Ballard, New York, E. P. Company, 1921)
忠武公縱橫談(李殷相, 思想界, 1955)
聖雄李忠武公論(千寬宇, 韓國史의 再發見, 一潮閣, 1974)
李舜臣(崔永禧,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73)
李舜臣(崔碩男, 韓國人物大系 3, 博友社, 1972)
文化財大觀―史蹟篇下―(文化財管理局, 1976). 〈李章熙〉 출처:엠파스
詩碑는 광복이듬해인 1946년 상해임시정부 주석이던 백범 김구선생이 진해에 와서 해안경비대-현 해군 장병들을 위로하고
조국해방을 기뻐하면서 이순신의 우국한시 진중음중 일부를 남긴 친필시를 화강암에 새겼다.(대한민국 29-1946-년 8월 15일)
건립초기 진해역광장에 새워졌으나 4.19이후 이 충무공의 전승지인 옥포만이 바라보이는 이곳 남원로타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1954.가을에 세우고 1991년 현재 위치로 옮김.
전국 문화단체 전국엽합회 통영군지부세우고 비문 김상옥,
경남 진해시 태평동 103 남원로타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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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후레지아 2006/01/26 22:36 # 답글

    몇년전인가 이순신 사당에를 갔는데..그분의 충심이 절로 머리를 숙이게 되더군요
    그러다 드라마 이순신을 보는 재미로 살다가 마지막 회를 보면서 눈물이..
  • 항구 2006/01/27 01:13 #

    아산인가요?
    이순신...대단한분이시지요.
    언제 기회되면 드라마 모아서 봐야겠군요.
    ^^*
  • 후레지아 2006/01/27 11:16 #

    아산아니구요 남쪽 임진왜란 수군 현장에요.
    참 이쁜 자녀들과 방학이니 다녀오심 좋은 사진도 찍을수 있을것 같네요
    있잖아요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칼옆에 차고...장군께서 시 읊으신곳..
    배를 타고 근사한 섬을 도는데 바다도 눈부시고
    이순신의 사당이 있는 섬에서 약 1시간 가량 쉬는데
    이번 명절에 마당하게 갈곳도 그렇고
    한번 다녀올까 구상중입니다.
    그리고 이순신 드라마 정말 근사했는데 꼭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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